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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시계

by 리치샘 2015. 6. 19.

한때는 시계가 부와 교양의 척도가 된 적이 있었다. 1960-70년대 더 늦게는 80년대까지 그랬던 것 같다.

시계를 찬 사람을 만나면 지금 몇 시나 되었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주 흔했던 시절. 산업화의 영향으로 시간 관념이라는 것이 생기고 시간이 생활의 질서 내지는 기준으로 작용하기 시작하면서 시계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자 시계가 없었고, 주로 기계 시계였는데, 워낙 정밀 기계이다 보니 값이 만만찮았다. 시계 메이커도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에만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계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오리엔트니 로만손이니 하는 브랜드가 생기긴 했지만 이는 시계가 어느 정도 일반화되었던 시기의 일이다.

한편 시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 관념을 갖고 산다는 표시이기도 해서 흔히 세련된 혹은 현대적인 사람으로 각인되기도 했다. 그것이 교양이 있는 사람으로까지 인상이 연결되기도 했던 것.

우스개 소리로 길거리를 걷다가 누가 시계 찬 나에게 지금 몇 시냐고 물으면 '안 가르쳐 줘!'라고 쬐려보는 눈으로 답하고, 시계가 있는데 왜 안가르쳐주느냐고 따지면 '시계 가진 나와 없는 너가 똑 같으라고??'라고 응대하곤 했다.


시골 집에서 잠깐의 밭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쉬다가 아버지의 시계를 발견한다.

테이프 진액과 배터리 액이 흘러 글자가 흐려지긴 했지만 그 내용은 이렇다. 정(각) 12시 20분, 시계 밧대리 교환, 서기 2005년 음 10월1일, 양력 11월 2일.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고 이 시계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배터리가 교환된 셈이다.  


아버지는 손목 시계를 여럿 사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아버지도 시계라는 문물에 동네의 다른 어른들보다 먼저 접했고, 예의 시계 문화에 동참하고자 하는 어얼리 어댑터 기질이 있으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면은 나도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바다.

하지만 이 시계는 기계식 손목시계가 아닌 배터리를 쓰는 전자시계다. 그것도 메이드 인 차이나.
기계식 시계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졌고, 시계의 정확도도 높아지면서 자명종 역할도 하는 이른바 다용도 시계다.



배터리 두껑을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예상했던대로 배터리 누액이 흘러나와 거의 폐품이 되었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이제 버려야 되겠제?' 하신다.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눈가에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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