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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1996년 겨울, 짧은 베이징 여행(3)

by 리치샘 2013. 9. 17.

중국의 술  

 
전날 저녁 마셨던 북경의 독한 술은 아침에는 거짓말처럼 말짱하게 깨어났다. 중국의 술들은 대체로 고량 성분이 함유된 발효주로 알콜 농도가 40% 이상인 독주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북경의 요리들은 주로 육류였고 이를 소화해내는 데는 독주가 필연적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아침 풍경


희뿌연 안개(실은 매연) 속으로 많은 사람과 차들이 뒤섞여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22층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는 북경의 아침은 분주함 속에 특유의 느긋함이 배어나고 있었다. 자전거와 차들이 8차선 도로를 가득 채우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처럼 소란스럽고 분주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거저 큰 강물이 흐르듯 유연하게 흐르고 있었다. 산자락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희뿌였고 요원한 하늘 위로 아침 해가 크고 붉은 쟁반처럼 거대한 신축 건물과 크레인 사이를 비집고 떠오르고 있었다. 호텔 바로 옆을 흐르는 강물은 고운 얼음판이 되어 있어 동네 아이들이 나와 스케이트를 지칠 법도 하였지만 아이들이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다. 몇몇 한가로운 늙은이들이 강둑을 따라 천천히 자전거를 젓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산보를 하고 있을 뿐, 길거리에서 흐르고 있는 자전거와 차들의 흐름만 움직임으로 드러날 뿐이었다.


아침 식사는 호텔 라운지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양식으로 식단이 마련되어 있어 전날 저녁을 먹었던 아리랑 식당보다는 덜했지만 입맛이 낯설지는 않았다. 라운지는 한 시간에 한 바퀴를 돌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곤륜 반점은 꽤나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수도꼭지가 고장이 나 있고 샤워기가 서양식으로 욕조 안으로만 드리우고 사용해야 한다는 점 외는 불편함이 없도록 설계되고 운영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사람을 감지하고서 가장 가까운 층에 있는 것이 자동으로 와서 문을 열어주는 최신식이었고, 건물 외벽으로 서너 개쯤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내리면서 북경 시내를 조감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었다. 단지 엘리베이터를 비롯 TV 등등의 전기 제품들이 일제 일색이어서 공항에서부터 눈익혀 왔던 우리 나라 회사들은 광고만 하고 마나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단체 관광객이라는 생각으로 거저 아무런 티킷도 없이 라운지 식당에 입장하려다 애띠어 보이는 아가씨의 제재를 받았으나 '코리안'이라는 말로 넘어갔다. 대체로 종업원들은 자신의 직분만을 다할 뿐 친절함이나 상냥함과 같은 인정은 없었다.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구분하여 시행하는 무뚝뚝한 기계와 같은 인상이다.
 

 팁의 개념


전날 저녁 간단한 미팅을 통해서 중국 땅에서의 행동 요령(?)을 주관 여행사 사장님으로부터 들은 바 있는데, 그 분 말에 의하면...
호텔방을 나서면서 청소원에게 주는 팁은 1,000원이면 족하다는 것,
방에 물건을 두고 나가도 분실의 염려는 전혀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샤워는 해도 좋지만 머리는 감는 건 물에 회 성분이 많으니 미리 알고 감으라는 것,
아울러 절대로 맹물을 그대로 마시지 말 것....
등등이었다. 

의아한 것은 과연 팁이 1,000원으로 족하냐는 것이었는데... 침대맡에 놓기가 약간은 민망한 기분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우리 돈 천원짜리 하나 달랑 두고 호텔을 나왔다(저녁에 돌아와 보았을 때는 우리의 돈 값어치에 비해 그들의 서비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시쳇말로 파리가 미끌어질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만리장성 가는 길
 

오늘의 일정은 가장 많은 얘기를 들어왔던 만리장성! 오후에는 천단공원행이란다.

우리는 만리장성을 일컬을 때 특별히 '만리'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중국 현지에서는 만리장성을 거저 '장성'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장성으로 가는 도로는 매우 넓고 잘 닦여져 있었다. 일직선으로 난 4차선 고속도로 위로 승용차, 화물차 등등이 차선 구분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운전사의 운전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차선을 변경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차는 별반 없었다. 알아서 추월하고 알아서 브레이크를 잡아주는 식으로 질주하는 데 차와 차 사이에는 마치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듯한 인상이었다. 동행한 쉰을 넘긴 두 쌍의 노 부부는 운전 기사의 운전 솜씨가 도사라고 혀를 내두른다.

안내하는 조선족 청년은 두어 마디마다 '우리'라는 낱말을 섞어 열심히 여러 가지를 설명해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처음 얼마간은 귀담아 들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내 '우리'란 소리를 몇 번이나 하는가에 관심이 옮겨지고 만다. '우리' 한국에서 오신 '우리' 손님 여러분을 '우리' 중국 사람들은 매우 '우리' 반갑게 맞이합니다. '우리' 조선족은 '우리' 북한과 하는 식이다. 한 10분 얘기하는데 무려 100번 넘게 '우리'를 연발한다. 

 

 동인당 약방


주최측(여행사)의 농간으로 중간쯤에 옆길로 새어서 동인당(同仁堂)이라는 중국 최대의 약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때까지는 미처 눈치를 못챘지만 현지의 중국 여행사는 우리들을 비롯한 관광객들을 거의 강제로(차가 그리로 그냥 가니까) 쇼핑센터로 데리고 가서는 물건을 사게 하는 일을 한 코스 중에 한두 군데 정도는 반드시 넣어두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면 안내원이 조르르 나와서는 입장권 같은 전표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들고 쇼핑을 하면 그 내역이 모두 적히고 총액을 계산해서는 그곳을 떠날 때 안내원 몫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그 몫이라는 것이 많게는 물건값의 80%나 된다니 안내원 하며 여행사가 강제 쇼핑을 시키는 저의가 분명한 것이다. 동인당이 그 첫 번째인 셈이었다.

'어서 오십시오'라는 또록또록한 우리말에 귀가 의심스러웠다. 딴은 떠나기 전부터 의사 소통 문제 때문에 영어권으로 가자는 제안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놓고 영어권인 괌이나 호주 등지로 행선지를 물색하기도 했었는데 말에 관한 불안이 한꺼번에 확 해소되는 것같아 기분이 좋았다. 우리말을 하는 그곳 안내원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안내되는 모든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북적대니까 북한식으로 표현한다면 외화벌이를 위한 지극히 당연한 당국의 조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동인당에서는 의사들이 있었는데 한국인 관광객이 들어가면 조선족 의사들이, 일본인이 들어가면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의사들이, 영어면 영어, 불어면 불어로 집맥을 하고 통역을 해주는 것이었다. 

장사하면 중국 사람 왕서방을 떠올리는 시절이 있었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은 우리 유행가 가사에도 나오질 않는가? 그들의 장사와 관련된 수완과 끈기는 우리의 보통 인내력을 훨씬 능가하는 면이 있었다. 흥정이 흥정으로 끝나는 법이 좀체 없다.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데는 정말로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은 동인당 뿐만 아니라 여타의 길거리 행상들은 극치를 보여주었다.

편자환이라는 이름의 약이 눈에 들어와 구입을 하긴 했는데 좀 무리한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갔던 용돈이 일정이 아직 남은 상태라 편자환 구입 후에 모자랄 것같은 생각에서 주저하다가 신용카드가 통용되는 것을 확인하고 카드로 결재하고 구입했다. 일행 중에 어떤 이는 정력제 없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은 약간은 실망스런 것이었다. 단번에 효과보는 정력제란 없다는 거였다. 대신에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윤활제 정도였고... 국내에 없는 특효약이 중국이란 나라에는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 자체가 잘못된 것이리라.

동인당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 있었다. 주위에는 민가가 거의 보이지 않는 뿌연 횟가루 먼지만 날리는, 광활한 마른 쑥대밭 한가운데에 말이다. 북경 주변의 겨울 풍경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이른바 살풍경 그 자체였다. 그 살풍경을 가로지르는 만리장성행 고속도로는 가도 그냥 와도 그냥 그냥인 구경거리는 길이었다. 1시간 넘게 달린 차가 산자락을 안고 돌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여기서 장성이 멀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가도 가도 장성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예사로 만들어진 성이던가? 몇 십 구비를 돌고 돌아 올라가더니 끝내 차는 숨이 가빠서 허덕거리기 시작했고 숨이 목을 채울 때 쯤에 좁은 성문을 통과하고는 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장성 주변 공식 주차장! 수많은 사람들이 겨울의 추위도 아랑곳 않은 채 분비고 있었다. 보아하니 외국인보다는 중국인들이 훨씬 많았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중국인들도 평생에 이 장성 한 번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란다.

 

 만리장성 인상-공룡의 공포
 

세계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만리장성! 험산의 산정만을 따라서 쌓아올린 방어벽. 성벽 망루쪽으로 올라섰을 때 거기에는 대로가 나 있었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 익히 보아왔던 그 성. 그러나 어떤 이의 책 제목처럼 '만리장성은 없었다!' 오죽이나 외적이 두려웠으면 이렇게 거대한 성벽을 쌓았더란 말인가? 수만명의 목숨을 삶아서 만든 믿기 어려운 대건축물. 그러나 그것이 무슨 성벽으로서 무슨 의미를 가졌더란 말인가?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그것이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한족의 조상들은 그 후손들에게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겨주고 있다고나 할까? 이 장성을 구경하기 위해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와서 뿌려주는 돈이 그 얼마나 될것인가를 추산해본다면 그 조상들의 음덕이란 그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한 가지 꼭 기록해두고 싶은 것은 광고판에 관한 것인데...
만리장성을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장성을 오르내리는 길에서까지 굉장한 크기의 입간판들이 있었는데 그 광고의 내용인즉 거의 우리나라 상품 광고였다는 것이다. 오리표 싱크도 있었고, 에이스 침대도 있었다. 북경 시내의 네온간판들도 상당수 우리나라 상품 광고였다. 

가파르고 지루하고 성벽 가운데 길을 올라가다 말고 내려왔다. 가도 가도 그 풍경이 그 풍경인 바에야 차라리 중간에서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옳았다. 성벽의 벽돌에 새겨놓은 깨알같은 수많은 이름들을 보는 만큼이나 지겹고 하릴없는 장성 구경. 돌아서 떠나는 길에서도 별 감회는 없었다.

장성 입구 양지 벽에 기대어 졸 듯이 신문을 보고 있는 낙타 배경 사진사가 인상적이었다. 살아있는 낙타를 길거리에서 본다는 점도 재미 있었지만 호구를 위해 고래고함이라도 질러 호객을 해야할 저 사진사는 사는 일이 그리 각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들판 한 가운데의 외국인 전용 쇼핑센터


차가 왔던 길을 되돌아 한참을 달리더니 허허벌판에서 브레이크를 밟으며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주위를 둘러본 즉, 인가라고는 없는 황량한 벌판 위에 덩그랗게 큰 건물이 하나 섰다. 가이드가 여기서 점심을 먹는단다.
아래층은 쇼핑센터고 위층은 엉청 큰 식당이다.
외국인 전용이란다. 쇼핑센터에 내몰려 들어가긴 했으나 뚜렷이 살 만한 물건이 없었다. 대개가 조잡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수정으로 만들었다는 말 모양의 장식을 들고 요리조리 뜯어보던 일행이 그만 말 모가지를 댕강 부러뜨렸다. 그런 정도의 물건 뿐이었다. 비단이 유명하다 해서 기웃거려보았지만 봉재 모양새가 내 어설픈 바느질 솜씨정도라 완제품을 사고 싶은 마음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어디서나 그랬듯이 식단은 푸짐했다. 입맛에 맞지 않아 군침도는 일조차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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