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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1996년 겨울, 짧은 베이징 여행(1)

by 리치샘 2013. 9. 17.

1. 가보고 싶었던 나라


중국, 우리 역사 삼국시대 이후 늘 기죽어 수그리고 눈치보던 나라, 우리 문화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아온 나라.

그 나라에 가고 싶었다.

중국, 거대한 공룡같은 이웃나라. 가장 많은 인구에 가장 복잡한 지리적, 인적 구조를 가지고 큰 소리치는 나라.

그 나라의 실상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단지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선 것은 우리 나라 형편이 그 나라보다 좋아졌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들 말대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명제를 확증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행선지와 일정 결정 과정의 혼란

사실 우리 부부 단독으로 해외로 나선다는 생각은 해외 나들이 경험이 이전에 전혀 없었던 상태에서는 매우 큰 모험이라는 생각때문에 꼭 중국이 아니라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우려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평소에 같은 분야에 대한 흥미로 인해 오랫동안 지면을 익혀온 컴퓨터 플라자 사장 부부가 해외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기도 하고 또 한 번의 해외 출정(?)을 계획하고 있다기에 동행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향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남태평양 연안의 어느 섬나라에 가서 푹 쉬었다가 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우리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놀다 오는 여행을 하기에는 우리의 경제적 형편이 윤택한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고, 거기다가 보고 듣고 해서 얻는 소득이 우리 부부의 지도안이 될 수도 있기에 태국, 괌, 대만, 필리핀 등으로 거론되던 나라들을 우선 순위에서 뒤로 미루고 싶은 심정으로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때마침 호기가 있었다. 여행사의 정보로 연말 가까이되어 중국민항이 주관하는 소위 덤핑관광 스케줄이 있다는 것이었다. 제주도 갔다오는 경비보다 오히려 싸게 갔다올 수 있는 북경 코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2박 3일에 39만원!! 다시 오지 않을 호기임에 틀림이 없었다.

1996년 12월 26일부터 29일까지 2박 3일간의 북경여행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중국국제민항공사 비행기의 연발

오후 12시 30분에 김해 공항을 출발하는 항공기 스케줄에 따라 우리는 여행사에서 모집한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아침 일찍 여행사 사장이 직접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김해공항을 향했다.

그러나 공항 청사에 들어서면 1시간 정도의 수속으로 비행기를 타는 걸로 알고 있는 우리 일행의 상식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적기가 아니라 중국 비행기인데 시간이 되었는데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왠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이륙 예정시간을 1시간 넘게 넘기면서 국내 여행사에서는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지만 그들도 마땅한 대책이 없는 눈치로 시계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난 뒤에서야 중국에서 날아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그것도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는 가늠할 수 없는 것같은 표정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청사 내의 한식집-여행사 직원의 말로는 가장 고급이라나?-에서 후다닥 한 그릇먹고 다시 기린 모가지를 하고 활주로와 안내 모니터만 쳐다보기를 또 두어시간, 비행기는 4시 반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활주로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은 중국국제민항공사의 비행기는 우람하고 세련된 채색을 한 국적기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해 보였다. 덩치만 작은 것이 아니라 트랩을 올라서면서 과연 이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낡아빠진 비행기였다.


2. 비행기 안에서 만난 엄선녀(嚴善女)라는 조선족 아가씨


공항 내에 있는 은행에서 환전을 하면서 헛갈리기 시작했다. 이국으로의 행차, 그 미지의 행로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그런 것하며 이국의 체제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도대체 얼마를 환전해 가야 할 것인가? 지폐로? 동전은 또 얼마 하는데 대한 판단의 어려움. 주위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어떻게 하라는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50만원 정도는 환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잣대도 없은 판단으로 환전을 하려고 우리 돈을 세고 있는 동안에 여행사 직원이 나타났다. 왠 돈을 그렇게 많이 바꾸느냐는 것이었다. 한 30만원을 되도록이면 달러로 환전하되 중국돈은 소액 지폐와 동전을 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중국에 가서야 알았다.

어쨌든 지루한 기다림 후에 비행기에 앉긴 했지만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냄새가 온 비행기 안에서 풍겨나고  있었다. 승무원들의 차림이 딱딱하기 그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줌마 스튜디어스는 꿔다놓은 보리자루 같이 상냥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겨울이 들면 중국도 해외 여행객들은 썰렁하단다. 하긴 추운 날에 또 무슨 일로 추운 나라에 가겠는가? 이름하여 비수기. 이 때문에 정기항로를 개설해놓고 비행기는 띄워야 하고 호텔도 음식점도 놀릴 수는 없으니 그냥 한 번 다녀가 달라는 의도의 기획이 바로 우리가 참여한 상품이었다. 너무 싼 경비 때문에 이러나 했는데 뒤에 들은 바로는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특징이란다. 하긴 살맛이 나지 않은 체재이고 보니 그 체제가 그 모양이 되어가는구나 싶었다.

어쨌든 동승한 손님들 대부분은 우리 나라 사람인 듯 했고 어쩐지 인민복 같은 인상을 주는 차림에 까치 머리를 한 사람들은 짐작에 중국인인 것 같았다. 세개 좌석이 나란히 붙은 우리 부부의 좌석에 한 자리를 한 아가씨가 앉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잡고 안정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아가씨에게 말을 건네어 보았다. 아가씨의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로 이 아가씨가 토종(?)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국 연변에 사는 조선족 아가씨였다. 외모로는 비행기에 조르르 같이 탄 우리 대학생들과 변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연변의 어느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무작정 상경 바람(?)을 타고 북경으로 와서 우리나라 회사의 북경 사무실에 근무한다고 한다. 이름이 예뻤다. 엄선녀, 티없어 보이는 얼굴하며 말하는 태도도 이름과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을 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호기심을 자아냈다.

내친김에 이런저런 질문 공세를 퍼부어댔다. 교사를 왜 그만 두었느냐는 첫 의문에 그녀의 대답은 짐작했던 대로 역시 경제 문제였다. 초등학교 선생의 월급이 그들 돈으로 400원,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4만원 정도라고 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봉급이었지만 어쨋든 그 돈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했다. 우리 나라를 몇 번 오가면서 그녀는 양쪽의 체제를 어느 정도 비교할 수 있는 안목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약간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그곳이 사회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가지고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녀는 우리의 경제적 풍요를 부러워하는 눈치였지만 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태도는 중국에 가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중국 특유의 무던한 자세였다.

우리 부부가 컴퓨터를 둘다 만지고 있어서 중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글자를 배열해서 컴퓨터 자판을 사용하는지 궁금했다. 그녀도 컴퓨터를 만진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부수와 획수라는 개념으로 처리한다고 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런 식으로는 전산화라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매우 비경제적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너 원래 글자 생김새와 글자를 만든 원리가 그렇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늦게 출발한 비행기가 우리보다 시간이 두 시간 빠른 중국쪽으로 다가갈수록 빠른 속도로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발 아래 깔인 구름 저 끝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짙은 재빛 구름이 이불솜같이 온통 하늘에 깔려 있는 저 끝으로 짙은 핑크색의 태양이 저물고 있었다. 황홀했다.

비행기가 요동을 하더니 하강하기 시작을 한다. 드디어 북경에 왔구나 싶다. 구름을 뚫고 내려와 지면에 가까이 가고 있는데 땅은 칠흑이다. 대도시의 휘황찬란한 야광은 아무리 창쪽으로 고개를 빼어서 살펴도 보이질 않았다. 거대한 검은 동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 드디어 깜깜한 북경에 왔다.

<1996년 12월 26일~29일 베이징 기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