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고향의 중산초등학교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들면서 전학을 간 곳이 부산의 부민동에 있는 부민초등학교다. 그때 함께 간 친구 찬희와 부민동 산허리에 자치방을 얻어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밥이며 빨래는 찬희 누나가 해줬다.
중학교는 추첨을 해서 학교를 배정 받았는데, 나는 영남제일중학교에, 친구 찬희는 어느 학교인지 몰라도 하여간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아마 대신중학교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래서 둘의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구덕야구장과 구덕터널 중간 쯤이었다.
중학교 2학년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친구와 친구 누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방을 내게 남기고 자취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주인집에 제사가 들었고, 손님이 온답시고 두 칸 방 중 한 칸을 쓰고 있던 나더러 다른 곳에서 자고 오라고 했다.
보수동에 있는 고모님댁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학교에 갔더니 학교가 술렁대고 있었다. 물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당시 광성공고(지금의 부산신학교 자리) 아래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그 저수지 둑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 결과 물가에 있었던 자취집은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렸고, 그 집의 할머니와 막내 딸 등 2명이 물에 휩쓸려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나에게 남은 것은 전날 입은 교복과 들고간 책가방 뿐이었다.
나는 이재민이 되어 한동안 대신중학교 운동장에서 텐트 생활을 하다가 급하게 마련된 동래 반여동의 이재민 주택으로 주인과 함께 가게 되었다. 거기서 학교까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도저히 통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고모님댁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단칸 방에 생활이 어려웠던 고모님은 늘어난 식구인 나를 많이 부담스러워 하셨다.
하루는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나타나셔서 동대신동 산꼭대기 부근에 방을 새로 구해 급한 이사를 시키셨다. 거기서 혼자 자취생활을 제법 했다. 겨울이 다가올 무렵 아버지께서 김치가 가득 든 양철통을 매고 오셨다. 그 김치로 몇달을 연명했다. 그마저 곰팡이가 필 정도로 내버려두고 제대로 먹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그 당시 도시락은 밥에다 조선간장을 뿌려서 싸갔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살았던 나를 살리자고 위탁한 곳이 어머니의 고모님댁이었다.
서면 부전역 앞에 있는 왕고모님 내외분이 운영하시던 오복식당에서 밥을 먹고 맞은 편 옛 흥아타이어 양정 방향에 있던 집에서 잠을 잤다. 찌개와 국밥이 맛있었던 오복식당은 번창을 해서 2층짜리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아랫층은 식당이고 위층은 살림집이었는데, 아래층에서 구이용으로 피워대던 연탄불로 인해 연탄가스를 마시고 흐느적거린 기억도 있다. 그렇게 중학교 졸업할 때가지 신세를 진 것 같다.
그 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누님 둘과 형 그리고 어린 동생 뻘 등 모두 4형제가 있었다.
그 후로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 임태원이라는 이름의 혼주가 딸 시집 보낸다고 청첩장을 어머니에게 보내왔다. 태원이라면 동생뻘인 것 같다. 식장에서 얼굴을 봐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얼굴이 많이 변해 있었다. 얼핏 그 아버지의 얼굴색이 남아 있는 듯 했지만 예전의 어릴 적 모습과는 매치가 되지 않았다.
어쨋든 그 딸이 11월 10일 오후 1시 부산 서부터미널 인근 르네상스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사 유감 (0) | 2013.11.18 |
---|---|
신출내기 바리스타 (0) | 2013.11.18 |
진해 6.25참전용사 기념비 (0) | 2013.11.11 |
청도 적천사 (0) | 2013.11.04 |
어처구니 없는 지하주차장 사고 (0) | 2013.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