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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미얀마

2024년 12월 미얀마 여행(4) - 핀우린

by 리치샘 2025. 1. 6.

핀우린 Pyin Oo Lwin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미얀마 도시는 핀우린이다. 현지인들은 '삐울린'이라고 부른다. 메이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영국 식민지 시절 제 5벵갈 경비 사령관이었던 제이 메이의 성과 도시를 뜻하는 미얀마어 묘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니까 메이의 마을이란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당시 영국군은 버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만달레이 왕궁을 접수하여 사령부로 사용했다. 하지만 만달레이는 여름철에 지금도 그렇지만 엄청나게 더웠다. 최고 기온이 영상 35~6도를 오르내리는데다 습도까지 높아서 거의 숨을 쉬기 힘든 상황을 나도 겪은 바 있다. 이 더위를 피해서 생활하기 위해 건설한 곳이 핀우린이다.
그래서 핀우린에는 지금도 당시에 건설된 관공서며 주택, 공원, 호수, 심지어 골프장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내 한복판에는 퍼셀타워라는 영국풍의 시계탑도 있다.
만달레이의 해발고도는 약 70미터, 핀우린은 1,000미터이며, 만달레이와 핀우린 간 도로의 길이는 65킬로미터이다. 평지를 뺀 40킬로미터 남짓의 산기슭을 S자(혹은 지그재그) 모양으로 고도 약 1천미터를 오르내리는데 올라갈 때는 몰라도 내려올 때는 현기증이 날 정도다. 실제로 귀가 멍멍해짐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종족들

당시 영국인들은 하위 공무원이나 일꾼들을 인도와 방글라데시 쪽에서 데려왔다. 식민통치를 하면서 제국주의자들은 대부분 새로 점령한 지역에 이미 점령한 지역의 사람들을 데려다 활용했다. 이러한 행태는 식민지배 방식의 전형이었다.

미얀마의 골칫덩어리 중 하나인 로힝야족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이슬람교도이면서 방글라데시 계통인 로힝야족은 영국인들에 의해 미얀마로 이주되어 현재의 미얀마 라카인주를 중심으로 살았다. 그들은 영국인이 시키는 대로 원주민이었던 미얀마 라카인족의 토지를 빼앗고 그들을 소작인으로 삼아 그 땅을 지배하였다. 생김새부터 원주민과 다른 이들은 불교 대신 이슬람으로 개종을 강제하기도 했다. 졸지에 땅과 기득권을 빼았겨버린 미얀마 원주민들은 로힝야족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영국군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원상태로 돌리려는 미얀마 원주민들과 현상태를 유지하려는 로힝야족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점점 격화되면서 서로를 죽이는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다. 아웅산 수지 정권 시절 수세에 몰려 있던 미얀마 군부는 이들의 분쟁을 이용해서 대다수 미얀마인들로부터 대척점이 있던 로힝야족을 무자비하게 학살 추방하는 인종 청소를 자행하였다. 지금 백 만 이상의 로힝야 족이 방글라데시에 마련된 난민촌에 머물고 있거나 보트 피플이 되어 인도양을 떠돌고 있다고 한다.

핀우린 시내를 걷다보면 실로 다양한 생김새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인도계, 방글라데시계, 버마계, 중국계 등에다 미얀마의 소수민족까지 합세해서 사는 곳이 되다보니 마치 인종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족들이 살다보니 종교 시설로 교회, 성당, 이슬람 모스크, 힌두교 사원, 중국식 사찰, 미얀마 사찰 등 있을 건 다 있다.

호텔에서 본 핀우린 시내의 동틀 무렵. 나무 오른쪽으로 불을 밝힌 힌두교 사원이 보인다.

내셔널 깐도지 가든

내셔널 깐도지 정원 National KhaDawGyi Garden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립 정원이다. 나라에서 만들었다는 건데 그 나라는 바로 영국이고 현재는 미얀마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국식 정원인데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타워, 그 아래에는 나비박물관과 난원이 있다. 깐도지 호수를 주변으로 울창한 숲과 잔디 광장, 꽃밭이 조성되어 있고 호수에는 백조와 흑조가 유유자적하게 놀고 있다. 미얀마인은 무료 입장, 외국인은 1만 짯의 입장료를 내야한다. 많은 미얀마인들이 내방하는 명소이다.
때마침 한 달 여 동안 개장 100주년 기념 플라워 페스티발이 열리고 있어 공원은 예쁜 꽃들로 단장되어 있었고, 잔디 광장에는 젊은이들의 락 페스티발로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 로제의 'APT'에 맞춰 신나는 댄스파티가 펼쳐지고 있었다. 

 

커피와 포도주

핀우린은 커피와 포도주가 유명하다. 토양이 좋고, 기온차가 심해 채소류도 많이 재배된다. 우리나라 기업 농우종묘와 CJ푸드가 진출해 있기도 하다.
만달레이 방향에서 핀우린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커피Coffee라는 글자가 들어간 안내판을 여럿 볼 수 있는데 이 일대가 커피 농장이다. 커피 농장의 개수 많고 규모도 크다.
미얀마 국립 커피연구소도 이곳에 있다. 
몇 번 이곳이 생산된 커피를 사먹어본 적이 있는데 아직 가공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인지 맛과 향이 고급스럽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포도주 역시 핀우린 남쪽 마을 아네사칸의 만달레이-라시오 로드 길가에 많은 노점상과 시내의 술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으나 몇 번의 시음 결과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히려 핀우린 산보다는 또 다른 포도주 산지인 인레호수 인근의 따웅지 산이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점차 확대되고 있는 커피와 포도 농장의 규모와 추세로 봐서 오래지 않아 명품 커피와 포도주가 나올 거라고 예상된다.

흔히 볼 수 있는 커피 나무

미얀마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위스키 종류도 다양하게 생산되고 있다. 애주가들에게는 반가운 이야기일 텐데 미얀마의 위스키, 럼 등 알콜 도수가 높은 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싸다. 일반 위스키와 럼 주는 500밀리리터 한 병에 우리 돈으로 2천 원 정도에 불과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커피를 첨가한 만달레이 럼주에 반해서 거의 하루 걸러 한 병씩 사서 나누어 마셨다. 이 역시 1리터 한 병에 8천 짯 그러니까 3천 원이 안되는 가격이었다.

닷토짜잇 폭포

핀우린 아랫 동네 아네사칸Anesakan의 과일과 포도주 노점상이 있는 삼거리에서 서쪽 길로 들어서 'The View'라는 안내판을 따라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카페 쪽으로 올라가면 웅장한 절경이 펼쳐진다. 거의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절벽으로 폭포수가 몇 층을 이루며 떨어지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 폭포의 이름은 탓토짜잇이다.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절에서 폭포 쪽으로 난 길이 있긴 한데 내려 가는 것은 한 40분 정도 걸리지만 올라오는데 걸리는 시간을 단정하기 어렵다. 그만큼 길이 가파르다. 
그래서 폭포 건너편에 있는 더 뷰 레스토랑에 마련되어 있는 전망대에서 폭포의 장관을 한눈에 보는 편을 권장한다.
이번에 가보니 예전에 없던 짚라인도 생겼다. 아마도 카페에서 산허리를 타고 돌다가 옆에 있는 리조트에서 내리는 코스로 보인다. 

닷토짜잇 폭포

핀우린의 지인들

미얀마 방문 때마다 핀우린에 들리다보니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있다. 전직 교장 선생님 킨마라툰 여사는 나와는 동갑내기. 현직에 있을 때 그녀가 근무하던 학교를 비롯해 인근의 몇 개 학교에 사무기기 및 학용품을 기부하면서 인연이 닿은 분이다. 이 분은 조카 쪼묘왕의 아내와 만달레이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은퇴하고 아네사칸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딸, 사위, (외)소녀들과 살고 있다. 이 분은 핀우린을 방문할 때마다 자신의 집으로 우리 일행을 초대해서 미얀마 전통 음식을 대접해준다. 참 마음이 따뜻하고 고운 분이다.

킨마라툰 집, 미얀마 전통 음식으로 차려진 오찬

또 다른 지인은 만달레이의 우베인 다리에서 만난 미얀마 소녀 지윤(미얀마 이름 자니윈). 그녀는 만달레이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워 한국계 회사에 근무하다가 한국어 학원 강사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새 직장을 얻어 네피도에 있다고 한다. 그녀의 고향은 핀우린에서 북쪽으로 차로 약 1시간 정도(거리는 약 30km) 가야하는 샨주의 시골 동네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지윤이 졸업한 학교에 약간의 기부를 하겠다는 의향을 전했더니 돌아온 요청 사항이 책상과 의자를 기부해달라는 것이었다. 수량은 한 교실 분 50조 정도.
당시 한국의 책걸상 가격을 알아보고서는 상당히 난감한 지경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한국의 학교 책걸상 한 조는 대략 30만원 선, 50조면 1천5백만원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기부을 할 때마다 국내의 지인들에게서 3백만원 내외의 기금을 마련해 기부를 해왔었는데 모금하기에는 벅찬 금액이었다.
그런데 미얀마는 달랐다.
견적을 보내온 걸보고 믿기지 않았다. 300만원이면 책걸상 50조를 사고도 절반 이상이 남을 정도로 어의없이 저렴한 견적이었다. 일단 책걸상을 주문하라고 하고 돈은 학교 방문 때 전달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실제로 가보니 학생들이 쓰는 책상은 합판으로 만든 아주 소박한 것이었고, 의자는 등받이가 있는 플라스틱 야외 의자였다. 나머지 돈으로 학용품을 사서 학교와 고아원 두 군데를 방문해 나누어 주었다.
약속 시간을 두어 시간이나 넘기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지윤이네 동네 사람들은 동네 입구에서부터 도열하여 전통 음악을 연주하면서 반겨 주었고, 학생들은 한 명도 하교하지 않고 전통춤 공연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황송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평화롭고 인정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지금 내전에 휩싸여 있다. 지윤이는 만달레이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석 달 정도 쉬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핀우린을 방문하고 있던 시점에도 집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전기와 통신을 정부 측에서 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윤이 집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 160km 정도 떨어진 샨주 북쪽의 거점 도시 라시오가 소수민족군들에 의해 점령 당하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그 여파 때문인지 핀우린에서도 전화 통화가 안되는 때가 많았고, 인터넷은 사진 한 장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느렸다. 

이 두 사람 외에도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준 골프장 캐디들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이들로 수입이 그 어느 직종보다도 높아 캐디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미얀마인들의 평균 월수입은 15만짯, 우리 돈으로 5만원 정도라고 한다. 우리가 캐디 손에 건네주는 팁은 평균 3.5만짯, 열흘만 일해도 미얀마인들의 평균 월급보다 많은 셈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한 골프장에 평균 100명 이상의 캐디들이 있고, 주중에서는 골프장 방문객이 어림잡아 40명 내외(10팀 정도)이니 60명은 하루를 공치게 된다.
그래서 다른 캐디들에게는 야속한 일이지만 우리 일행은 그간 인연이 닿은 능력있고 착한 캐디들을 미리 예약해두고 머무는 내내 그들과 함께 했다. 그렇게 해야 잠시지만 그들에게 확실한 수입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쪼민툰과 옌옌, 퓨퓨 등등이 그들이다.


고아원 방문

앞서 얘기한 대로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지윤이 출신 학교 방문하던 때, 기금이 남아서 두 군데의 고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 군데는 원생이 수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대규모 시설이었고, 다른 한 군데는 부부 목사가 운영하는 원생 30여 명의 조그만 시설이었다. 대규모 고아원은 한 번의 기부로 끝냈다. 기부를 받아주는 자세가 너무나 의례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기부는 주는 사람의 기쁨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부부 목사가 운영하는 곳은 일반 주택을 개조한 듯했다. 아마도 자신의 집을 고아원으로 내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작년 이 고아원을 다시 찾아 갔더니 고아원은 사라지고 없었다.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봤더니 그 부부목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같은 날에.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사고가 있었냐고 물었더니 사고는 아니었단다. 그럼?
불현듯 머리에 전율이 생기면서 모든 생각이 하얗게 변함을 느꼈다. 한국인 목사가 도와줘서 고아원을 차렸다던 그 목사 부부는 어느 날부터 한국인 목사와의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양곤의 한 골프장에서 만난 한국인 한 분은 포교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정보를 준 적이 있었다. 갑자기 연락 두절된 목사 + 포교를 빙자한 사기! 이 둘이 겹쳐면서 울분이 물끊듯이 솟구치면서 눈물이 감당을 할 수 없이 쏟아졌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애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주민에게 물었더니 인근에 새로 고아원이 하나 생겼다면서 거기로 안내해주었다. 쌀을 몇 푸대 마련해서 작년 방문했던 그 고아원을 이번에도 역시 쌀 푸대를 들고 방문했다. 이 고아원의 이름은 신성한 마음Sacred Heart Orphanage이다. 수녀님들이 운영을 하고 있고 원생은 약 40명 정도.
이곳엔
훈남인 쪼민툰이 3~4년 후에 결혼할 예정이라는 어여쁜 아가씨와 내셔널 깐도지 가든의 대나무 카페The Bamboo Cafe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 그레이스도 함께 했다.

고아원이 이름처럼 신성함이 오래토록 유지되기를 빌어본다.


아름다운 핀우린 사람들과 이별을 하면서 그들을 초청 초촐한 만찬 모임을 했다. 100년 넘은 영국식 저택을 개조한 더 테라스 레스토랑에서 였다. 몇몇은 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긴 해도 킨마라툰 선생님 가족, 그동안 수고해준 캐디들과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 마음씨가 천사같은 사람들이 사는 미얀마가 내홍을 빨리 벗어나고 세계 최빈국에서 탈출해서 그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대한민국처럼 발전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