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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미얀마

사가잉의 명소

by 리치샘 2023. 12. 15.

미얀마의 사가잉은 만달레이구와 에와야디 강 건너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행정구역 이름이자 도시 이름이다. 사가잉 구는 남쪽으로는 만달레이구와 인접해 있고, 북동쪽으로는 카친주와, 북서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사가잉구의 남쪽 끝에 사가잉시가 위치하고 있고, 여기서부터 사가잉 구 최북단 인도 국경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700km. 구글 지도로 길찾기를 해보면 사가잉에서 최북단 인도 국경 팡사우(Pangsau)까지 차도로 800km 정도, 약 17시간 소요되는 걸로 안내된다.
그런데 사가잉에서 소수민족 반군들이 군부 군대와 교전을 벌였고, 군부가 전투기와 헬기를 동원해서 폭격을 해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적이 있었다. 뉴스에는 구체적인 지역명이 밝히지 않은 채 단지 미얀마 북서부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사가잉 지역이 넓고 산악지형이 대부분이다. 반군들의 활동지역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는 남부 만달레이 인접 지역은 아니고, 북서부의 인도 국경지역으로 짐작이 된다. 현재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민족 반군들과 군부 군대와의 교전은 대부분 인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보이스피싱단 일망타진과 관련한 소수민족군의 군부 부대 및 진지 파괴 관련 사건은 카친주의 중국 국경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되 최근 소수민족군과 군부 군대가 휴전하기로 했다고 한다.

미얀마 행정 구역도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정치 상황이 아니다. 만달레이와 접해 있는 사가잉 시 지역의 불교 유적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만달레이를 방문할 때마다 강 건너로 보이는 무수한 불탑의 언덕이 무척이나 신비로웠고 궁금했다. 미얀마에서 불탑이 없는 동네는 없지만 산과 언덕을 온통 뒤덮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사가잉 언덕이 바로 그곳이다.

에와야디 강을 건너는 여정은 여남 번이나 되는 미얀마 여행 중 딱 한 번. 밍군 대탑과 밍군 대종, 그리고 눈부시게 햐얀 신쀼메 파고다를 보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남는다면 사가잉에 있는 수많은 불탑과 사원 중에서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있는 까웅무도 파고다를 방문해 볼 요량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두를 다 돌아보긴 했지만, 나머지 그냥 지나친 수많은 불탑들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사가잉 다리에서 본 사가잉 언덕

만달레이 시의 남쪽에는 아마라푸라와 잉와라는 지역이 있다. 두 곳 다 버마의 마지막 왕조인 꼰바웅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에와야디 강의 범람으로 인해 생긴 큰 호수인 타웅타만이 있고, 이 호수의 서안에는 마하 간디용이라는 천 명 넘는 스님들이 수도를 하는 아주 큰 규모의 수도원이 있다. 이곳 승려들의 호수 건너 편까지 오가는 탁발 공양을 돕기 위해 목재로 만든 다리가 우베인 다리이다.

만달레이에서 사가잉으로 건너가는 다리의 이름은 에와야디(영국인들은 이라와디라고 칭했다)교이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한강 철교를 연상시키는 철골 구조의 다리이다. 이 다리의 남단에는 포토존이 있다. 거기서 촬영한 사진이 위의 사진이다.

에와야디 다리. 만달레이와 사가잉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차량 통행 다리이다. 왼쪽으로는 철교와 까웅무도 파고다가 보인다.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해서 에와야디 강을 따라 올라가면 거의 길이 막다른 곳에 밍군대탑이 있다. 흔하디 흔한 미얀마의 탑들 중에서 유독 이 탑에 대(大)자가 붙은 것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미얀마 마지막 왕조인 꼰바웅 왕조의 전성기인 1790년, 보다파야(Bodawpaya)는 왕위에 오르면서 거대한 꿈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그것은 높이 152m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불탑을 짓는 것이었다. 역대 미얀마의 왕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왕위를 자축하고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바간 왕조의 왕과 귀족들이 수많은 불탑을 쌓아 공양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얀마의 대부분의 탑은 전탑 즉, 벽돌을 일일이 쌓아서 만든 탑이다. 건설공사에는 수천 명의 노예들과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한 노예들이 도망하는 일이 생겼다. 왕은 도망가는 노예들을 추격하다 인도 국경을 넘게 되었다.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은 이것을 빌미로 버마에 전쟁을 선포한다. 이것이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병합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 되고 말았다.
노예들의 도망과 그로 인한 전쟁 때문에 중도에 불탑 공사는 중단되어 현재의 높이인 70m의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그마저도 두 번의 큰 지진으로 인해 대탑이 갈라져 곳곳마다 위험하게 큰 틈이 나 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만달레이에서 이곳까지 배를 타고 오간다. 시간을 정해놓고 운행하는 정기편도 있고, 일정한 승객이 모이면 출발하는 배편도 있다. 물론 택시 개념의 배도 있다. 강 어귀에 닿으면 소달구지 택시를 만날 수 있다. 달구지지만 얼기설기 엮은 객석 껍데기에는 분명히 'Taxi'라고 적혀있다.

정상까지 출입이 허용된 때가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2/3 지점에 철문을 달아 정상부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밍군대탑

밍군 대탑 주차장 앞에는 거대한 코끼리 형상이 있다. 입혀진 색깔이 퇴색하여 대부분 원래의 벽돌색으로 변했지만 자세히 보면 흰색이 입혀져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의 코끼리는 매우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다. 특히 흰코끼리는 함부로 만져서도 안되는 영물로 인식한다. 그 이유는 석가모니의 탄생과 관련된 전설 때문이다.
전설은 바로 마야 부인이 석가모니를 잉태했을 때 꾸었던 태몽에 관한 내용이다. 꿈에 하얀 코끼리가 등장해 부인에게 연꽃을 주었고, 그 후에 부인은 석가모니를 임신해 낳았다고 한다. 

흰 코끼리를 만져서 생긴 사건도 있었다.
영국군이 미얀마를 침략하고 있던 1885년 버마 왕조의 마지막 왕인 띠보(Thibaw) 재임시 불길한 일이 발생했다. 당시 왕궁에서 관리하는 하얀 코끼리가 죽었는데, 이로 인해 왕이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코끼리의 죽음이 곧 왕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소문은 영국군에게도 흘러들어갔고 전의를 다시 다진 영국군은 왕궁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군이 왕궁에 들어서자 하얀 코끼리의 사체가 눈에 띄었다. 이들은 거칠게 끌어내어 버리려 했다. 이를 본 버마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영국군은 무례하고, 불경했으며, 무자비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지경에 이르른 버마인들은 정글로 숨어들어 게릴라 전을 준비했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는 버겁다고 판단했던 그들은 게릴라 레지스탕스 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이는 약 10여 년이나 이어졌다고. 영국군은 흰코끼리를 함부로 다룬 행동에 대한 댓가를 10년간 되돌려받아야 했다.
하얀 코끼리는 미얀마 화폐 5천 짯 짜리에도 새겨져 있다. 미얀마에서는 하얀 코끼리를 최대한 신성하게 대해야 한다. 수도 네피도의 한복판에 있는 우파타산티 파고다 출입구 앞에는 흰코끼리 여러 마리를 사육하면서 절에 오는 사람들에게 신성함을 일깨우고 있다.

밍군대탑 앞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코끼리 상. 자세히 보면 벽돌을 쌓아서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회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밍군대탑에서 내려다본 에와야디 강

밍군대탑 옆에는 또 하나의 명물 밍군대종이 있다. 보다파야왕이 밍군대탑에 바친 종이라고 한다. 1808년 시작하여 1810년 주조했고 무게 약 90톤, 둘레 5m, 높이 3.7m로 타종이 가능한 세계 최대의 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종은 강에 있는 섬에서 만들었고 운하를 만들어 옮겼다고 한다.
이처럼 보다파야왕은 세계 최고 최대의 건축물을 계획했던 야심찬 인물이면서 그 야심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버마 왕조의 말로를 재촉한 인물이 되어 버렸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밍군대종. 사람이 여럿 종 속에 들어가 있다.(구글지도)

밍군대탑과 대종의 역사를 생각하면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노예들을 잡아오기 위해 국경을 넘은 것이 결국 영국과의 1차 전쟁으로 비화하고, 이후 2, 3차의 전쟁을 치루면서 버마 왕조는 영국에게 연패,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밍군대종 종각에서 걸어서 수 분만에 닿는 곳에 신쀼메 파고다가 있다. 이 파고다는 전체가 화려한 조형미를 뽐내면서 동시에 전체가 눈부신 하얀색으로 덮여 있다. 마치 설원에 서 있는 것처럼 강렬한 눈부심을 피할 수 없다.

신쀼메 파고다


에와야디 다리를 건너 사가잉 시내 쪽으로 난 대로를 따라가면 북쪽으로 가면 거대한 돔 모양의 불탑이 보인다. 까웅무도 파고다이다.
사가잉은 1315년 바간왕조의 혼란기에 샨족이 독립하면서 세운 왕조가 1364년부터 전성기를 누린 곳으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까웅무도사원은 스리랑카의 마하제디 파고다를 모델로 건설된 사원으로 1636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1649년에 완성되었으며 바간에서 본 사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일명 공주의 가슴이라고도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왕족의 공주 가슴처럼 둥근 모양이라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높이가 46m, 둘레가 274m이며, 탑 안에는 부처님의 이마뼈와 머리칼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탑 둘레에는 높이가 1.5 m나 되는 대리석의 기둥 812개가 탑을 둘러쌓고 있다. 이 대리석기둥들은 축제나 불교행사 때 불을 밝히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내가 방문할 당시에도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탑의 외벽을 벗겨내고 새로 금칠을 하는 작업이었다.

보수 중인 까웅무도 파고다. 매달린 사람들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불교는 바로 생활이다. 눈을 뜨면 집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탁발승에게 공양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약간의 재물이라도 생기면 절에 먼저 바치고 나머지를 본인들이 쓴다. 미얀마 사람들의 기부 지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만달레이 힐에서 보이는 만달레이 시내. 누런 물길이 에와야디 강이고 그 건너편이 사가잉 땅이다.
만달레이 아마라뿌라 지역에 있는 우베인 다리. 석양이 언제나 멋지다.

사가잉에서 만달레이로 돌아올 때는 오후 해질 무렵이 좋다. 에와야디 다리 건너편에 우베인 다리가 있어 그곳에서 석양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석양은 언제나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미얀마의 선남선녀들은 이 다리를 함께 걸으면 좋은 인연으로 발전한다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