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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미얀마

미얀마는 어떤 나라인가?

by 리치샘 2021. 9. 9.

과거 미얀마는 우리에게 축구를 잘하는 나라(1977년 제1회 박스컵대회 한국과 공동우승),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1983년)으로 기억되는 나라다. 이것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라 이름이 미얀마가 아니라 버마였다.  물론 지금도 미국과 영국 등 서방에서는 버마라고 부르고 있다.
<참고 : 미얀마 이모저모>

최근에는 군부 쿠데타와 그에 저항하는 민주회복운동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연상시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한류 바람을 탄 많은 미얀마인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지정학적 특징
미얀마는 아시아 전역에서 열번째로 큰 나라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가장 큰 나라로 우리나라(한반도)의 6배 면적을 가지고 있다. 지도 상으로 보면 영토가 폭보다는 남북으로 긴 형상을 가지고 있고, 동으로는 태국과 라오스, 북쪽으로는 중국,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방글라데시와 접해있다. 서쪽과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산악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가운데로는 에와야디 강이 북쪽 끝에서 남쪽의 양곤까지 이어져 있다.

영문 표기는 영국식 지명, 한글 표기는 현지인들이 쓰는 지명이다.


북쪽은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 지점, 인도와 중국의 접경 지역에 동남아에서는 가장 높은 카까보라지 산(해발 5800미터)이 있다. 이 산은 1996년에야 최초 등정이 이루어질 정도로 험준한 산이다.

카까보라지 산(출처 :  Flicker)

가장 큰 강인 이리와디(현지음은 에야와디) 강은 총 길이 2,200km로 산스크리트어로 코끼리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강은 세계 2위의 수자원국이 되는 중요 자원이며 강의 폭이 넓고 물길이 완만해서 주요 수송로로 이용되고 있다. 남쪽의 제1도시 양곤과 북쪽의 제2도시 만달레이의 해발고도 차이는 불과 70미터 정도다. 이곳에는 에야와디 돌고래가 살고 있다고 한다. 에야와디 강을 비롯 큰 강이 4개나 있어 수자원이 매우 풍부해서 중국의 11배, 우리나라의 25배나 되는 풍부한 수자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얀마인들은 식음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다양한 민족 
미얀마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종족수만 해도 135개인 다민족 국가이다. 68%를 차지하는 버마 족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수민족들이다. 민족 분포는 다음과 같다.

출처 : 위키백과

대체로 저지 즉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에는 주로 버마 족들이 살고, 산악지대 등 고지에는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다. 소수 민족 중에서도 메인(main)이라고 할 수 있는 7개 종족은 까친 족, 친족, 라카인 족, 몬 족, 카렌 족, 까야 족, 샨 족 등이다. 이들 민족의 분포도는 다음과 같다.

버마족이 주로 사는 지역은 행정구역상 '구(Region)'라고 하고,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은 '주(State)'라고 부른다. 위의 그림에서 베이지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구'이다. 즉 만달레이구, 양곤구, 마궤구 등으로 불리며,  소수민족들의 지역은 샨 주, 까친 주, 라카인 주 등으로 불린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까친 주의 소수민족인 까친 족은 15~16세기 중국 윈난성에서 이주해왔으며, 영국의 포교 덕에 기독교도가 많다. 까친 족 안에도 12개의 소종족이 있다.
친족은 23개의 소종족이 있으며 침례교도이다. 친 구뿐만 아니라 사가잉구에도 많이 살고 있다.  
라카인 족은 방글라데시와 접경 지역에 살고 있으며,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이 당시 인도(현 방글라데시)에서 이주시킨 로힝야 족(약 240만 명)과 갈등을 겪으면서 살고 있다.
몬족은 남아시아계로 인도에서 태국으로 이주하다 정착한 종족이며, 버마 족에게 밀리기 전까지 이 지역의 터줏대감 노릇을 했다.
카렌 족은 태국과의 접경 지역에 살고 있으며 강력히 분리 독립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반군을 결성하여 미얀마 정부군과 전투를 종종 벌이고 있다. 이 종족의 여성들은 목에 링을 끼우는 풍습이 있는데 일부는 태국으로 건너간 살고 있으며, 유명 관광지에서 관광상품이 되어 있기도 하다.
까야족은 레드 카렌(Red Karen)으로 불리기도 하며 인구는 많지 않다.
샨 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샨 주는 미얀마 전체 영토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넓다. 중국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음식 문화가 우리 나라와 닮은 점(메주, 김치 등)이 많다.
미얀마에는 종족부라는 중앙부처가 있을 정도로 종족과 관련한 문제는 복잡다단하다. 이들 종족 중에서 분리 독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종족은 라카인/아라칸 족, 까친 족, 카렌 족 등이다. 일부는 산악지대에 살고 있어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국경지대에서는 국경분쟁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산악지대에는 천연 자원이 많아 중앙 정부에서는 계륵과 같은 존재이다.

주요 도시
주요도시로는 옛수도였으며 여전히 경제, 문화, 외교의 중심도시인 양곤과 새 수도 네피도, 버마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만달레이가 있다.
양곤은 '적을 완파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도시는 몬족에 의해 건설되고, 영국 식민지 시절 번성하기 시작한 도시로 현재 미얀마 최대 도시이다. 영국은 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버마 왕조와 3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국이 식민지에서 벌인 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많은 돈을 쏟아부은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당시 버마 왕조의 힘이 대단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양곤(영국은 랑군 Ranggun이라고 불렀
다)인도양과 접해 있고, 중국으로까지 가는데 요긴한 에야와디 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영국이 점령한 후에는 동양의 하바나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같은 식민 영역이었던 인도 사람들을 비롯하여 약 900만 명에 달하는 다양한 외국인들이 거리를 메웠다고 한다. 양곤은 한때 싱가포르, 홍콩을 능가하는 가장 번성한 다문화 국제도시였다. 영국인 에릭아서 블레어는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양곤에서 경찰관 생활을 했다고 한다. 미얀마는 한때 세계 최대의 쌀 생산국이었는데 주요 자원인 쌀을 비롯해서 티크, 각종 보석 등이 양곤에서 거래가 되었다.
1962년 네윈의 군부 쿠데타 이후 버마식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면서 무역을 비롯한 국제 교류가 위축되었으며, 양곤은 싱가포르나 홍콩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높이 100미터, 67톤의 금이 입혀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각종 보석이 치장되어 있다.

양곤에는 미얀마의 랜드마크인 황금불탑 쉐다곤 파고다가 있다. 이곳에서 양곤의 도로는 시작이 된다. 이 불탑은 부처님 생전의 머리카락을 봉안한 곳이다. 1887년 러디어드 키플링(정글북 작가)은 '태양 속에서 타오른 황홀하고 경의적인 윙크'라고 쉐다곤 파고다를 표현했다.

당시 미얀마 군부통치자였던 딴 쉐는 2005년 11월 극비리에 전광석화와도 같이 수도를 양곤에서 320km 북쪽의 네피도로 옮겼다. 수도를 옮긴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던 군부통치자들이 바다와 접한 양곤이 포격을 비롯한 외세의 공격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짐작되고 있다. 네피도 인근의 핀마나와 예진에는 군부의 합참본부 등 핵심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군부 통치에 적합한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또 어떤이는 군부통치자가 신임해 마지 않았던 점성술사의 점괘를 믿고 천도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미얀마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 대통령궁과 인접해 있는 왕복 20차선 도로. 차의 통행이 거의 없다.


어쨋든 네피도는 '왕이 사는 곳', 또는 '왕국의 도읍지'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완전한 계획도시이다. 이곳에는 대통령궁을 비롯, 국회의사당과 정부의 부처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건물의 높이가 높지를 않고 특히 정부부처는 숲 속에 띄엄띄엄 위치해 있어 안내판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울 정도다. 외국 공관들은 여전히 양곤에 남아 있고, 네피도국제공항이 있으나 항공편이 활성화되지 않아 '그들만의 성채'로 불리기도 한다.
네피도의 중심부 언덕 위에는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웁파타산티 파고다(Uppatasanti Pagoda)가 있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를 그대로 모방하고 높이만 약 1미터 낮춘 이 탑은 당시 군부통치자 딴 쉐의 시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딴 쉐는 현재도 미얀마 제1의 갑부이다.

버마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제2의 도시이며,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군 사령부가 만달레이 성 안에 있었으며, 일본이 침략했을 때 역시 일본군 사령부가 궁궐 안에 있었다. 큰 화재를 겪어 도시가 재구획되어 바둑판식으로 되어 있어 동서로는 짝수 번지, 남북으로는 홀수 번지가 붙어 있어 특정 지역을 찾아가기가 쉽다. 만달레이 성을 비롯해서 버마 왕조의 화려한 건축 흔적을 볼 수 있는 쉐난도 수도원, 불경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쿠도도 파고다, 만달레이 힐, 마하무니 불상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으며, 만달레이 시내 남쪽 타웅타만 호수 주변의 옛 도읍지 아마라푸라에도 우베인 다리를 비롯한 유적과 볼거리들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만달레이 언덕에서 본 만달레이 시가지



만달레이 남서쪽으로 에야와디 강을 따라 내려오면 고대 미얀마 왕국 중 하나인 바간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바간(Bagan)이 있다. 10~13세기 무렵에 미얀마를 지배했던 바간 왕조는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여 부흥시켰으며, 왕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까지 공덕을 쌓는다는 의미로 수많은 불탑들을 남겼다. 당시는 약 5000기에 이를 정도였지만 현재는 2400기 정도의 불탑이 남아 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사원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꼽히고 있다.

불탑의 도시 바간


미얀마의 독특한 문화
미얀마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치마를 입는다. 론지라고 하는 치마 모양의 전통 의상은 입는 방식과 색상이 남녀간 다르긴 하지만 형태는 거의 같다.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 사람이 대거 입국하면서 전해진 의복이라고 한다. 론지에 엄지발가락을 끼우는 슬리퍼 차림이 보편적인 미얀마 사람들의 패션이다.


미얀마는 미국, 라이베리아와 함께 공식적으로 미터법을 쓰지 않는 나라이다. 시장에 가면 물건들 특히 농산물은 미얀마식 평행 저울을 이용해서 무게를 달아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표준시 또한 독자성을 표방한다면서 그리니치 기준 6시간 30분으로 설정해 놓았다. 인근의 태국에서 미얀마로 가면 30분 늦게 조정해야 하고 다시 태국으로 오면 30분 빨리 조정해야 하는 등 30분이 드나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미얀마 사람들은 성이 없다. 태어난 요일과 좋은 뜻을 가진 글자의 조합으로 이름을 짓는다. 그래서 비슷하거나 같은 이름이 많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여러 개를 가진 사람도 많다. 사람이 죽어 알리는 부고장에는 '이렇게... 저렇게... 불리는 아무개가 세상을 떠났다'로 적는 경우가 많다.

특산품
미얀마가 세계 1위를 차지하는 것들이 제법 있다. 
단단한 목재인 티크(Teak)는 전세계 생산량의 75% 점유하고 있다.
보석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이기도 한데, 루비는 세계에서 가장 품질이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사파이어와 안다만 지역에서 나는 황금색의 골든 진주도 특산품이다. 옥 중에서 경옥이 많이 생산되며, 비취 또한 많다. 그러나 채굴 여건 열악하고 어린이로 하여금 채굴에 동원하기도 해서서 루이비통 등 유명업체는 미얀마산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1853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석유 채굴했다. 시초에는 영국계 석유 회사들이 채굴을 독점했지만 지금은 한국, 중국 등 여러 자본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포스코인터내셔널(구 대우인터내셔널)는 천연 가스 채굴,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한때 쌀은 미얀마의 최대 수출품이었다. 3모작이 가능해서 넓은 농지에서 생산된 쌀이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쌀은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작물로 밀의 2배에 해당한다고 한다. 옥수수가 쌀보다 높지만 편식하면 병이 생기는 문제가 있어서 쌀은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주식이다. 
1960년대 초반 170만 톤 수출을 수출할 정도였으나 2000년 대 초반에는 17만톤 수출에 그쳤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도 쌀을 원조한 바 있다. 품종은 일명 안남미라고 하는 인디카 종(vs 자프리카)이었다.
지금도 미얀마는 전체 고용인구의 65%가 쌀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다. 군부독재의 쇄국과 사회주의 정책으로 생산성 1960년대의 생산량의 10%대로 떨어졌으나, 2018년에는 1960년대 생산량 회복(170만 톤)했다. 그러나 홍수, 싸이클론 등 영향을 많이 받아 생산량이 일정하지 않다. 농사법도 기계화가 덜 되어 있어 인력에 의지하는 측면이 강하다.

개방 정책 그러나...
1988년 8월 8일의 소위 8888민주화운동 이후 미얀마는 나라 문의 빗장을 풀고 외국의 투자를 받아들이는 등 부분적인 개방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2015년 아웅산 수찌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이 총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군부를 몰아내고 최초의 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후 개방은 더욱더 가속화되어 양곤을 중심으로 외국인 투자가 공장 및 부동산에 활발하게 이루어져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외국 기업들이 입주를 하였고, 양곤 도심에는 최신식의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산업 인프라는 아직도 전반적으로 열악한 편이다. 예를 들면 도로는 단 하나의 고속도로가 있을 뿐이고, 그마저 노면이 불량해서 시속 100km 이상을 달릴 수 없고, 대형 트럭의 통행은 허용하지 않은 왕복 4차선의 콘크리트 포장 도로이다. 민자를 이용한 기간 도로망 구축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현대적인 도로망을 갖추는 데는 많은 기간이 필요한 상태이다.

양곤-만달레이간 고속도로(2018년). 콘트리트 포장 상태가 매우 거칠다. 이정표 대신 콘크리트 비석을 세워 거리를 표시하고 있다.


철도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 건설한 노선이며 노후화되어 평균 속도가 3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기는 대부분의 도시에 공급되고 있으나 정전이 잦는 등 문제점이 많다. 시골로 들어가면 대부분 가정용 태양광을 설치하거나 유류 엔진으로 돌아가는 발전기를 이용하여 전기를 쓰고 있다.
산업단지에는 대규모 인력을 필요로 하는 봉제공장 등 경공업 업체가 많다. 인건비가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의류나 신발 관련 업체들도 상당수 진출해 있다. 코로나19 초기 부족했던 방호복을 미얀마에서 생산해서 군용기로 실어온 적도 있다. 그러나 미얀마의 대부분 의류 공장들은 원단과 실, 단추 등 원자재는 외국에서 들여와 말 그대로 봉제만 하는 식이어서 기반이 약하다.
그러나 그마저 2021년의 쿠데타로 외국인 투자가 위축되고, 생산인력의 이탈 등으로 생산성과 생산량이 줄어들었다.

 
미얀마와 불교
미얀마는 태국과 더불어 불교 종주국임을 다투고 있다. 태국과 마찬가지로 상좌부불교(테라와디, 소승불교라고도 한다)로 부처님 말씀에 충실하며 자기 완성을 우선으로 하는 불교이다.
9세기 경에 들어와 국교화되었으며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바간 왕조는 불교 문화를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왕조이며 지금도 2000기가 넘는 불탑을 유산으로 남겨놓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은 불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사원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신은 채 출입하여 미얀마인들의 자존심을 짓밟기도 하였으며, 1930년대 영국에 의해 불교도 1만여 명이 학살되기도 하였다.
1961년 정식으로 국교로 지정되었다. 미얀마인들은 빠야신이라고 하는 부처님을 모신 재단을 집집마다 두고 아침 저녁으로 불공을 드린다.
7~13세의 남아는 의무적으로 신쀼 의식을 통해 출가해서 몇 주 혹은 몇 달간 절에 머물면서 글자 익히기 등 학교 교육에 준하는 교육과 불경 공부를 한다. 신쀼는 미얀마인들이 가장 엄숙하고도 즐겁게 거행하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동네 잔치를 벌인다.

신쀼 의식 - EBS 세계 테마 기행에서 캡쳐


미얀마인들은 불교 가르침이 생활화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승려를 위한 공양 보시로부터 하루 생활을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것을 제외한 모든 재물은 절에 시주를 한다. 그것이 공덕을 닦는 일이라 여기며, 후세의 길업을 쌓는 행위로 여긴다. 그래서 기부지수는 수십 년 동안 세계 최고 수준을 지키고 있다.

미얀마를 후진국으로 만든 정치 체제
미얀마의 정치 체계는 군부가 통치하는 사회주의 체제이다.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정부 5년(2016~2021)을 제외하면 1962년 이후 군부가 통치를 계속하고 있다.
1962년 네윈이 쿠데타로 집권하고 난 이후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외국과의 교역을 끊고 자급자족체제를 고집하면서 미얀마는 모든 부분에서 낙후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은 동남아의 맹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다.
2008년 개정된 헌법은 군부 통치를 고착화했다. 우리 나라의 유신헌법 제정 당시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헌법은 몇 가지 점에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악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상하원 국회의원 1/3을 군부가 선거없이 차지한다는 점. 둘째, 국방부 장관 등 국가 통치의 핵심 장관은 대통령이 아닌 군부가 지정하게 되어 있다는 점, 셋째, 유사시 군 최고 사령관이 대통령을 대신해 통치를 할 수 있게 명문화시켜 두었다는 점 등이다. 이 외에도 아웅산 수찌 여사를 염두에 두고 외국 국적을 가진 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명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얀마의 현행 헌법은 군부 통치를 합법화시켜 놓은 것이다. 이는 군부를 통해 정치 권력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 권력 등 모든 권력이 나오도록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군부의, 군부에 의한, 군부를 위한 헌법인 것이다. 
여기에 복잡한 민족간의 분쟁이 다발해서 군부의 무력이 암암리에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헌법적 맹점 때문에 2021년 2월 흘라잉 군부 총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찌 정권을 내몰고 다시 집권하면서 군부 대 반군부, 독재와 민주, 소수민족의 자치권 요구 등 고질적인 문제들이 표면화되면서 미얀마를 재차 나락으로 끌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