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뺑뺑이 세대’라고 불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대표하는 - 그래서 10월 유신, 10.26, 12.12 사태를 거쳐 5.18로 막을 내린 -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이 바로 흔히들 말하는 58년 개띠들입니다. 선배들에게는 아이 취급을 받고 소위 386세대에게는 구세대로 따돌림을 당하는 틈바구니 세대이기도 하지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우리 나라가 초유의 동족상잔의 내전을 겪은 후에 베이비 붐 바람이 일어났고 비교적 전쟁의 위협이 사라진다고 인지되던 1957년에서 1962년 사이에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지요. 보통 한 집안에 형제가 6명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 중심점에 있으면서 역사적인 변화의 첫 바람을 맞은 횟수가 유독히 많은 이들이 1958년생이라고 생각됩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저는 제가 맏이이고 밑으로 5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자라온 과정은 요즘과는 판이했습니다. 생존 경쟁이 엄청났고, 그 와중에 끈끈한 형제애도 체감하면서 자랐지요. 이런 면이 요즘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습니다.
저는 아들 둘을 두고 있습니다만 둘을 키우면서 여섯이 겪었던 형제애를 심어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지난 해 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형제 많은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여섯 형제를 남기셨고, 우리 여섯 명은 이제 모두 성가해서 자기네 식구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명하지도 특별히 부자도 아니지만 삶의 터전은 나름 견고하게 다져놓고 살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아버지는 큰 은덕을 우리 형제들에게 베풀고 가셨다고 생각되네요.
하지만 베이비품의 중심 세대인 58개띠로서 제가 겪어온 변화들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농촌에서 태어나 그곳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를 6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부산으로 전학을 했습니다. 이유는 탈농촌, 무작정 도시로의 집중 현상에 편승한 것입니다. 한정된 땅에 농사로서는 많은 형제들이 살아갈 길이 없었던 것을 부모님들은 이미 감지하고 계셨던가 봅니다. 제 주변에 도시로 전학을 간 친구들이 상당수가 있었거든요.
중학교는 무시험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이전에는 시험을 쳐서 중학교에 진학을 했었는데 제 한 해 선배들때부터 뺑뺑이를 돌려 학교를 배정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대한 1류에서 3류, 심지어는 똥통이라는 평가 등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저는 불행히도 맨 마지막 단계로 평가되고 있던 중학교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와 같은 울타리에 있었던데 중학생인 저는 3년 내내 운동장에서 활개치며 공 한 번 제대로 차보지 못하고 중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무렵에는 이미 공업화 바람이 불어 공부깨나 하는 친구들 상당수가 소위 실업계인 상고나 공고로 진학을 했습니다. 저도 시류상 공고나 상고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고든 상고든 제 적성하고는 거리가 좀 있다는 느낌으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 인문계로 갈길을 잡았는데 이번에는 인문계 고등학교도 추첨입학제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58년 개띠들에게 이런 교육제도상의 큰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두고 당시 대통령의 아들이 개띠라서, 대통령 아들이 입시에서 떨어졌다는 상황이 발생하면 대통령 위신에 문제가 일어날거라는 이유에서 제도를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만 당사자인 저는 그런 저런 이야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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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