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 시작되었다. 한 이틀 비가 무지하게 내리더니 오늘은 공기가 청량하다. 집에 있기에는 아까운 날씨다. 길을 나섰다.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 오륙도가 바로 앞에 있는 부산 신선대 부두 지나 용호동 바닷가, 그곳에는 오륙도 스카이워크가 있고, 이기대로 통하는 트랙킹 코스(이기대 해안산책로=해파랑길)가 시작점이자 종점이 있다.
스카이워크 바로 아래에 공영주차장이 있고,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에도 공영주차장이 있다. 그러나 바닷가와 인접해 있는 가장 낮은 주차장은 주차 요금을 자동으로 카드 결제하는 시스템 대신 사람이 지키고 있으면서 무조건 2천원 선불을 요구했다.
절벽 위에 팔을 뻗듯 나와 있는 오륙도 스카이워크
오륙도, 동쪽에서 보면 6개, 서쪽에서 보면 5개의 섬으로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 쪽에서부터 방패섬, 솥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이다. 등대섬은 등대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고, 등대가 없던 시절에도 섬은 있었을 테니 비교적 최근에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오륙도 유람선 선착장에서본 오륙도.
내가 간 날 신기하게도 여기 온 사람들은 내국인보다는 외국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스카이워크는 말할 것도 없고, 이기대 자연마당 쪽으로 난 산책로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외국인(동양인이 서양인보다 많았다)이었다. 그 중에 혼자 온 한 외국인은 자기 폰으로 오륙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오륙도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본 오륙도스카이워크에서 본 이기대(왼쪽)와 멀리 보이는 해운대마주 보이는 곳은 부산 영도와 부산 구시가지, 오른쪽으로 신선대 부두의 크레인이 살짝 보인다.해운대의 마천루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4.7km, 부지런히 걸으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남해안의 해안 절벽에는 예외없이 일본군이 구축해놓은 포대 진지들이 있다. 이곳에도 포대 진지의 흔적이 남아 있고, 포탄 등을 비축해놓던 동굴도 있다. 구한말 제국주의가 득세할 때 일본군은 한반도를 교도보로 삼아 중국 대륙 쪽으로 진출하려고 했고, 당시 적수였던 러시아를 경계하기 위해 러시아 해군이 내왕하던 대한해협을 감시하고 유사시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포 진지를 이기대, 가덕도, 진해 등지에 만들어 두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진지를 이용하여 일본군은 러시아와의 한반도 쟁탈전(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중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던 것이다.
이기대 해안산책로. 산봉우리 7부 능선 쯤에서 산허리를 감고 돌아간다.요트 한 대가 잔잔한 바다를 가로질러 해운대 쪽으로 향하고 있다.
오래되지 않은 옛날 이곳은 아주 외진 곳이었던 것 같다. 감자밭이 있던 자리(이 밭은 안타까운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음)와 그 인근에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부산은 아파트의 도시라는 말이 실감난다. 산업 시설들은 죄다 시 경계 언저리 나가고 없다. 도심은 시들어 가고 있고, 해안선을 따라서 고층 아파트들만이 키 자랑하듯이 들어서고 있다. 일자리는 별로 없고 사는 집만 빼곡한 기이한 도시다. 그래서 부산은 소멸 위기가 가장 큰 도시로 꼽히고 있는 모양이다.
오륙도 스카이워크 인근에는 카페 하나와 진열 제품이 여느 가게보다 아주 소박한 편의점 한 군데 외는 점심 시간 허기를 면할 수 있는 변변한 식당 하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빈배를 움켜쥐고 태종대로 향했다. 태종대 입구에서 밀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떼웠지만, 역대 먹어본 밀면 중 가장 무미하고 무성의한 음식이었다.
태종대 공원 내에 있는 태종사에 수국이 유명하다고 하는 정보가 있어 오르막길로 30분 정도 걸어서 태종대 순환도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태종사에 다달았다. 색상은 다양하였지만 때가 지났는지 생기가 부족한 수국이 듬성듬성 있었다.
태종사 인근에는 영도 유격부대 전적비가 있었다. 이북 출신인 반공청년단이 주축이 된 유격부대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태종대 남쪽 바닷가 벼랑에는 큰 등대가 있다. 이곳 주변은 바다와 관련한 개척자들의 흉상과 등대 관련 전시물들이 있어 가볼 만한 곳이다.
태종대는 바닷가 쪽이 말 그대로 깎아지른 절벽들로 되어 있어 예로부터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휴게소와 전망대가 시설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유원지가 되어 있어 과거의 자살바위라는 인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전망대 바로 앞에 있는 주전자섬. 등대가 아주 도드라져 보인다. 그 앞으로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전망대 앞에 있는 모자상, 그리고 좀더 입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있는 또 하나의 절 구명사(救命寺). 이런 것들이 과거의 희미한 흔적이 되기를 바래본다.
사실 부산 영도는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3년의 세월을 보낸 곳이다. 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녔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1974년 1학년 때는 학교가 청학동에 있었다. 1학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근에 있던 유류저장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학교의 유리창이 모두다 깨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자기 책걸상을 짊어지고 우리는 해양대학교가 쓰다 아치섬으로 새 캠퍼스를 지어 이사해버려 비워져 있던 캠퍼스로 이사를 갔다. 대학교 캠퍼스라 울타리가 없었고, 건물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어서 비가 오는 날이면 교무실이 있는 건물로 선생님을 모시러 당번이 우산을 들고 갔었다. 운동장 끝은 바다라 축구 골대로 공을 차넣으면 굴러서 바다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 공은 골을 넣은 친구가 건져와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었다. 그러다 학우를 잃기도 했다. 그 사고를 계기로 우리는 비오는 날 시교육청 앞에서 격분에 찬 데모를 했었다. 이후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 울타리도 만들고, 교사로 새로 짓는 등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부산 인구의 급감 특히 젊은층의 이탈로 인해 학령인구 감소되어 내가 다녔던 학교는 폐교될 상황까지 갔었다. 관계자와 동문들의 노력으로 명지 국제 신도시 쪽으로 이전하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
태종대에서 본 송도 쪽 풍경
태종대 유원지 주차장에서 빤히 보이는 이 건물이 있는 지역은 예전에 군대가 주둔하던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던 곳이었다. 무장 공비가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저 건물 너머 산기슭을 마주하고 있었다.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니 군인들은 없는 모양이다. 아니 무장 공비가 없어진 거겠지.
하숙집이 있던 동삼동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고, 그 앞 바다는 매립이 되어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50여 년의 세월이 과거의 흔적으로 모조리 지워버려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나의 고등학교 응원가 첫 소절은 '검푸른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실제로 운동장 끝이 태평양이었고, 교실 창밖 풍경은 늘 망망대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