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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

통영 문화 기행(2)

by 리치샘 2025. 6. 3.

유치환의 직업은 교사 혹은 교장이었고, 김춘수는 교수, 국회의원이었다. 약간은 다른 길을 걸었지만 사후 그들의 공통 칭호는 시인이다. 그것도 통영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 현대 시인이다.

미륵도 바닷가에 위치한 김춘수 유품전시관은 언덕배기에 있는 전혁림 미술관에서 바다 쪽으로 난 직선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만나게 된다.
흔히들 '무의미의 시'라는 한마디로 김춘수 시인의 시세계를 이야기 하지만 나의 생각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이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평생토록 글을 쓴다는 것은 시인의 정신세계와는 배치되어 거의 불가능한다고 생각한다. 

대표작 '꽃'

그의 육필 원고를 보면 단아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여담인지만,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글쓰는 이를 위해 전용 원고지를 제공하는가 보다.


'통영읍'은 김춘수와 그의 예술 동지들이었던 유치환, 윤이상과의 교우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시이다.

도깨비불을 보았다.
긴 꼬리를 단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비석고개
낮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뜨음했다.
시구문에는 유약국이 살았다.
그 집 둘째가 청마 유치환
언이불언이라
밤을 새워 말술을 푸되
산군처럼 그는 말이 없고
서느렇던 이마,
해저터널 너머
해핑이로 가는 신작로 그 어디 길섶
푸르스럼 패랭이꽃
그리고 윤이상,
각혈한 그의 핏자국이 한참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늘 보는 바다
바다가 그날은 왜 그랬을까
뺨 부비며 나를 달래고
또 달래고 했다.
을유년 첫
조금 전의 어느날.

실제로 유치환은 아버지를 닮아 행동으로 말을 대신했던 듯하고, 윤이상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할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다음 사진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름이 가려진 인물들이 있다.

화가 하태암, 음악가 최상한, 국어학자 김용오의 이름이 가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6.25를 전후로 해서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에 최상한은 윤이상의 죽마고우이자 음악 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 독일에 머물면서 몇 차례 북한 방문 때 조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을 드러내어 전시하고 있는 곳과 가려서 전시하고 있는 곳, 그 생각의 차이는 지금도 멀다고 생각된다.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그는 반평생을 나누어 조국 대한민국과 또 다른 조국 독일의 시민으로 살았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은 당시 정치인들의 비열한 정치 행위에 의해 과대하게 포장된 사건이었음이 판명되었다.(참고 : 동백림 사건 ).
지금은 독일에 있던 그의 유해가 통영으로 이장되어 있고, 그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등 다시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인물로 복원이 되었지만 그가 겪어왔을 고초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된다.

윤이상 기념관은 매우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비스듬히 누운 야외 공연장은 그냥 편한 자세로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된 듯한 편안함을 준다. 1층에는 카페가 있고, 2층에는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참고 영상)
[경남의 거장을 만나다] 윤이상, 그는 왜 천재 작곡가인가 / KBS 2023
독일 언론이 애도한 윤이상의 죽음(KBS다큐)


미륵도 남쪽 끝자락에 있는 박경리 문학관과 묘소를 가보고 싶었으나, 문학관은 휴관 중이라고 김춘수 유품전시관의 안내인이 알려주었다. 묘소는 가볼 수 있다고 했으나 문학관이 문을 여는 다음 기회에 함께 가볼 셈을 하고
서피랑으로 갔다.

피랑은 벼랑의 이곳 방언이라고 한다. 즉 깎아지른 듯한 언덕이다. 앞서 통영기행 1편에서 언급했듯이 통영은 이순신 장군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하면서 세운 세병관을 중심으로 바로 앞으로는 움푹 들어온 바다 동구안이 있고, 동구안의 동, 서쪽에는 동피랑과 서피랑이 있다. 이들 피랑의 꼭대기에는 바다의 정세를 살필 수 있게 동포루와 세포루하는 누각을 세웠다. 

서피랑에는 99계단과 건반 모양의 계단을 밟으면 소리가 나는 피아노 계단과 그 주변으로 높은 음자리 형태의 데크 계단이 이색적이다. 


언덕에는 금계국이 만발해 있다.


피아노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오래되고 거대한 후박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후박나무의 수령은 200년 정도라고 한다.

이 들고양이는 이곳이 자기 영역이라고 버티며 침입자를 경계하고 있다.
서피랑에서 내려다본 통영 시내. 바다 건너가 미륵도(산양면)이다.
전면에 보이는 지붕이 날렵한 건물이 통영국제음악당이다.
미륵도 케이블카. 케이블카 상부 정류장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미륵산 정상에 닿고,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산도, 사량도, 만지도, 욕지도, 연화도, 매물도 등등. 수많은 섬을 연결하는 배편이 닿는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
서피랑 정상 바로 아래에 만들어둔 전망대. 등대와 뱃머리가 짝을 이룬다. 전망대에는 키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키를 돌려놓고 찰칵!
서포루와 성곽

읽어보면 어찌 낯익은 곡조가 떠오르지 않는가?
'돌아와요 충무항에'란 곡의 가사이고, 이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조라고 한다.
[노래 들어보기]
통영 출신의 김성술이 작사하고 황선우가 작곡한 이 노래는 김성술(예명은 김해일)이 대연각 화재로 요절(1971)하자, 작곡가 황선우가 '둘아와요 부산항에'로 개사해서 조용필 등이 불러 큰 히트를 했다.
[자세한 내용 보기]


서포루 북동쪽에 세병관이 있다.

세병관과 부속 건물들
서포루
다도해를 연락하는 배 중 한 척이 통영항으로 입항하고 있다.
서포루에서 동쪽으로 동구안이 보인다. 왼쪽에 세병관이 있다.

통영에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문학가 박경리가 있다. 이곳 출신이고, 이곳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장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썼다.
그러나 박경리를 불현듯 이 통영을 떠나 50년 동안 한 번도 방문하지 않다가 말년에서야 돌아왔다. 돌아와 쓴 시가 '옛날의 그 집'이다.

참고 : 박경리의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 전문과 연대기


왜 50년 동안이나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많다. 5월 중순 통영 방문 때 윤이상 기념관의 해설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경리의 어머니는 살림이 가난하여 당시 세도가였던 박의원 집의 보모로 일했다. 그 집안 경험을 전해들은 딸 박경리가 그것을 바탕으로 '김약국의 딸들'을 썼다. 이후 엄앵란, 황정순, 박노식, 허장강 등이 연기한동명의 영화가 통영에서 촬영되었는데 그 내용을 전해들은 박의원이 노발대발해서 박경리 네를 통영에서 떠나라고 했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여러 사료를 찾아본 결과 가장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이유는 박경리 작가 개인의 삶의 아픔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서피랑 99개 계단 상부 끝 벽에는 박경리의 사진과 그녀의 작품들, 그리고 '옛날의 그 집' 일부가 새겨져 있다.
서피랑 99계단


박경리 문학관 휴관, 또다른 현대판 피랑 디피랑, 동피랑의 벽화 섬세 감상, 통영 공예품(나절칠기, 갓 등) 관람 및 수산물 시장 탐방 등을 못한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지만 다음 기회에 만회해보려고 한다.

이번 통영 기행을 대변해주는 글귀를 서피랑 언덕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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