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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미얀마

2018 여름 미얀미 기행(4) - 민원하이스쿨 학용품 기부

by 리치샘 2018. 8. 21.

미얀마를 몇 번 다녀왔는지 이제 횟수가 아리숭해진다.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인가? 첫 방문이 2011년 1월이었으니 벌써 7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여섯 번 미얀마를 다녀오면서 못내 아쉬웠던 점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그저 그 곳의 풍광이나 즐기고 가성비 좋은 시설에서 운동이나 하다가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미얀마 행부터 학용품을 가져가서 필요한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려고 마음 먹었다. 기실 지난 해부터 계획을 하고 짐을 줄이기 위해 지난 1월에는 골프백을 아예 미얀마 네피도에 있는 조카 쪼묘왕의 집에 맡겨놓고 왔다. 

쪼묘왕은 첫 방문 때부터 알고 지낸 내 큰 아들과 같은 나이의 유능한 친구로 미얀마 농업연구소(DAR)에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곧 한국에 올 예정이다.

쪼묘왕은 에뚜조와 함께 매번 내가 미얀마에 갈 때마다 도움을 준다. 에뚜조는 쪼묘왕과 동갑내기이고 사업을 하는 명랑하고 활달한 친구로 골프로 인연을 맺었다. 내가 미얀마에 처음 갔을 때 겨우 골프에 입문단계였던 그는 아마추어로서는 미얀마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선수가 되어 있다. 

두 친구는 미얀마에서는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들이 사는 집을 가보면 우리의 70년 대 정도의 환경이다. 나는 그들의 삶이 나와 비교했을 때 자꾸만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옷을 가져다준 적도 있고, 동행하는 사람들과 분담을 해서 전기 담요도 사다준 적이 있다.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미얀마 페북 친구들


외국인과의 교류에 SNS는 절대적이다. 그 나라 말을 알면 더 좋겠지만 중학교 수준 정도의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를 만나면 의사 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다.
태국 사람들은 라인에 눈이 박혀 있음을 보았다. 우리가 카톡에 그렇듯이. 미얀마 인들은 페이스북이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이는 거의 페북을 한다. 나의 조카들 쬬묘왕(Kyaw Myo Aung)도 에뚜조(Ye Thu Zaw)도 그들의 아내도 페북을 한다. 심지어는 영어 깡통인 지난 1월과 이번 여행에서 운전을 했던 몽몽(Maung Maung)이도 페북을 한다.

소식은 페이지를 통해 대강 알고, 급한 일이 있거나 연락할 일이 있으면 페북 메신저를 이용한다. 화상 및 음성 전화도 페북 메신저를 이용한다.

지금까지 친구 사이가 되어 있는 미얀마인은 대략 20명 가량, 대부분이 오프라인에서도 대면했던 인물들이다.

명예퇴직을 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미얀마 아이들을 돕는 일이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1차 시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페이스북 친구들 힘이 절대적이었다.

미얀마에서 볼펜을 한 자루 사려면 3달러 정도, 가장의 하루벌이를 다 써야 볼펜 한 자루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은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익히 봐왔던 터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 주변에서는 제대로 다 쓰고 버리는 필기구가 거의 없는 정도로 낭비가 심하다. 어차피 다 쓰지도 않고 버릴 물건이라면 미얀마에 갖다주자는 것이 내가 이 일을 추진하게 된 처음 취지였다.  

학교 선정부터 그랬다. 진정 연필, 볼펜 등 학용품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는 학교를 선정해야겠는데 솔직히 미얀마의 학교 편제나 학교 운영 주체 등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교육 행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도 몰랐고. 그래서 페북 친구들을 총 동원해서 그 정보를 먼저 캤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이이타라고 하는 소도시에 있는 민원하이스쿨을 선택하게 되었다. 미얀마로 출발하기 전에 이 학교의 킨마라툰(Khin Mar Hla Htun) 교장 선생님과 많은 메시지를 주고 받으면서 준비를 해갔다.

만달레이에 잠시 들러 몽몽이 호텔에 두고온 신분증을 되찾고 만달레이-양곤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고속도로로 약 1시간을 달리다가 동쪽으로 빠져서 1시간을 더 가야하는 행로였다. 교장 선생님과 운전사 몽몽이 전화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서너 차례 유창한(?) 미얀마어로 통화를 하는 모양새만 봐도 길을 찾아가는 것이 순조롭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예감과는 달리 몽몽이는 자신있게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어느 구간에 들어서더니 갑자기 서행을 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미얀마에는 아직도 이정표가 거의 없다. 몽몽이 손가락으로 '민원 티쳐'라고 외친다. 고속도로 가에 오토바이를 대고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민원 하이스쿨 선생님들이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다. 

구글지도에서 검색을 해봤는데 '민원(Min Won)' 또는 '민원하이스쿨'은 검색되지 않았다. 단지 마이이타라는 소도시는 검색이 되어 그곳을 목적지로 해두고 찾아가는데 몽몽이는 엉뚱한 곳에서 그 선생님들과 약속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쨋든 마중을 나왔으니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기들이 앞장서고 우리가 따라 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황무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데 소떼가 많이 나타난다. 소는 차를 처음 보는 듯 비킬 생각을 않는다. 길은 움푹움푹 패여 있어 걸어가는 편이 더 빠를 정도였다. 오토바이를 탄 선생님들은 차보다는 현저하게 속도가 빨라서 가다가 기다리고 가다서 뒤돌아보는 일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이런 비포장길을 한 시간 여를 달렸다.


드디어 민원 학교에 도착했다. 구글 지도를 믿고 갔다간 전혀 엉뚱한 곳에서 헤맬 뻔 했다. 학교는 조그마한 마을 한 켠에 아주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피난민 수용소에 왔나 했다.
늘 더우니까 창이 없는 것은 이해된다. 그런데 간이 치고는 너무 표나게 적당히 지은 것 같은 건물이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교무실은 따로 없고 이 실이 업무실이라고 했다. 화이트보드에 빽빽하게 적혀 있는 내용은 아마도 학교 현황인 듯했다. 선생님들은 맛있는 양젖과 과일을 준비해 두었다. 우리는 양젖만 한 잔 씩 들이키고 곧바로 짐을 풀었다.


가져간 물건은 연필 1천 자루, 볼펜 1천 자루, 색연필 500자루, 지우개, 자, 필통, 배구공, 축구공, 물감, 크레파스, 장남감, 손톱깎기 등등 대략 30kg 정도였다. 


일부 물건들에 대해서는 사용 설명이 필요했다.


초, 중, 고등학교 대표 각 2명 및 선생님들과 기념 촬영.


학용품을 기꺼이 보내주신 분들 명단이다. 애초에 파일을 작성해서 교장 선생님께 보내 출력을 부탁할 계획이었는데, 학교에 출력 장치가 없었던 모양으로 출력이 불가함을 알려왔었다. 가서 보니 컴퓨터는 비닐에 싸여 있었다. 급하게 매직으로 썼다.
보내 주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린다.  

(학교) 김해건설공고, 봉명중학교, 곤양중학교, 삼랑진고등학교, 삼천포여중, 밀성여중, 창원기계공고, 금남고, 삼천포공고, 경남항공고(무순)
(보내주신 분) 이충희, 임용권, 송태웅, 최재만, 박종언, 조미혜, 이남영, 강병호, 이채임, 김분옥, 이영숙, 전수근, 이호, 고정택, 김진원, 곽의섭, 천근식, 김성원, 백성길, 채대종, 고병길(이상 존칭 생략, 무순)


기념 촬영을 하고 학교를 둘러봐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승낙을 해준다. 수업을 거의 마칠 시각이어서 다행이었다. 이 학교는 초, 중, 고등 과정이 한꺼번에 운영되는 학교다. 그러니까 초등 5년, 중 3년, 고 3년 등 총 11학년 체제로 되어 있었다. 이름은 민원 하이스쿨이지만 프라이머리, 미들, 하이스쿨이 한 살림을 하고 있는 거다.

두 학급이 있는 2개 학년과 1개 반인 나머지 학년 등 총 13개 반이 있었고, 학생수는 833명이라고 한다.

교실은 서너 개만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집이었고, 나머지 과정은 사진에 보는 바와 같다. 


학생들은 하나 같이 밝은 표정으로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특히 고등부 학생들은 '안녕하세요?'를 합창하면서 합장 인사를 해주었다.


이 아이들은 벽이 없는 교실에 있다. 앞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몇 자나 필기할 수 있을런지.


이 아이들의 교실도 벽이 없긴 마찬가지. 옆 교실과의 경계로 대나무 벽을 쳐놓았다. 바닥은 흙바닥이다.


이 학생들은 고등학교 과정, 최고 학년인 듯 했다. 다들 너무나 착한 천사의 미소를 짓으면서 합장 인사를 했다.


한 교실에 60명 이상 들어앉아서 공부했던 시절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아이들은 초등 과정의 저학년인 듯.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다.


1천만원이면 교실 한 칸은 넉넉히 지을 수 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비가 잦은 이 나라에 우기에는 어떻게 공부를 할까 자못 궁금했다. 더 능력이 된다면 교실을 지을 수 있는 기금을 마련해서 기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이 착하고 친절한데 가난하다(Honest, kind and poor)고 했다. 
나는 천사들을 보는 듯 했다. 어느 하나 외면하는 학생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해맑은 미소로 친근감을 드러내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 천사 외는 달리 어울릴 존재가 없어보였다.

약 30여 분 머물다 우리는 마침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전교생의 환송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 나는 교장 선생님에게 약속했다. 이번에는 무엇이 필요한 지 내용을 잘 모르고 무작정 학용품을 들고 왔는데 다음에 올 때는 필요한 물건을 사전에 꼭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에도 방문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은 떠나는 우리에게 답례인 듯 까만 비닐 봉지 두 개를 건네주었다. 
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보니 우리 나라 양파의 절반보다도 더 작은 양파들이었다.
순간 의아했다. 설마 우리더러 이걸 한국까지 갖고 가라는 뜻은 아니겠지?

어떤 의중인지 끝내 짐작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해석을 했다.
이 양파는 이 지방 특산품 임에 틀림이 없으며, 귀한 농작물일 것이다. 자기네들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닌 게 분명하다. 농사 짓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 동네에서 우리에게 보답할 수 있는 최상의 품목을 선정해서 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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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골프+여행+봉사(기부)활동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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