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람과 엮이어 산다. 사람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도 엮이어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가 내 한 몸만으로 살 수 없으니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형성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경계하는 버릇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믿음이 깨졌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 내게 눈빛이라도 주면 잔뜩 경계한다. 저 놈이 내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 하는 생각부터 한다.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다. 동남아의 나라들, 특히 태국이나 라오스, 미얀마에 가면 사람들이 한없이 정겹다.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 모르는 사람이라도 인사를 하면 아주 반갑게 응대해준다. 나아가 무슨 불편이 없느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없냐는 식으로 적극적으로 인정을 베풀어준다. 아주 소극적인 사람이라도 적어도 남에게 해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미얀마 관광-호텔부 홍보 자료 중에서
댓 번을 방문한 적이 있는 태국은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생각이다. 이것은 앞서의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몸에 깊숙히 베어 있는 불교의 가르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제 필리핀에서 한국인 3명이 총을 맞고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불현듯 예전에 필리핀에서 당했던 대낮에 눈알을 빼가도 남들 듯한 사기, 술수, 협잡이 떠올랐다. 사람을 죽이고도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하면 된다는 식의 와전된 가톨릭의 가르침이 팽배해 있는 곳이 바로 필리핀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마냥 우리 나라에서 못된 짓을 한 인간들이 도망가서 활보하는 곳도 필리핀이라는 말이 있다. 예의 동남아 국가들과는 아주 다른 행태이다.
나는 목하 예전 태국에서 받았던 따뜻한 인정을 우리 땅에서 갚으려고 하고 있다. 이곳에 와 있는 태국인에게 말이다. 그녀는 페이스북을 통해 간혹 교신하던 태국에서 아주 잠깐 만났던 여인이다. 서른 다섯이나 나이를 먹었는데 마음씨는 청순한 10대 소녀같은 처녀다. 그런 그녀가 어느 협잡꾼에게 꼬여 한국에 왔다. 돈을 쉽게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서 이국만리까지 온 것이다.
와서 보니 애초의 이야기하고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방 하나에 여덟 명이나 사는 방에 던져졌고, 여권은 비행기값을 핑계로 압수당했고, 태국식으로 마싸(마사지)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외 것도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게 연락을 해왔다. 탈출하고 싶다고, 가능하면 돈도 대신 좀 갚아달라고 했다. 다른 일을 해서 갚겠다고 하면서.
나는 망설였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내가 그녀와 인연이 있다고 하면 그저 태국 갔을 때 골프장에서 얼굴 며칠 본 것(그녀는 당시 캐디였다)과 페이스북 친구라는 점 외는 없는데 말이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그녀는 백방으로 도움을 청해 일단 돈 문제를 해결하고 다행스럽게도 풀려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왔던 경기도 시흥을 떠나 충청도 공주로 거쳐를 옮겼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그녀를 한국에 머물 수 있는 기간 동안 최대한 안전하고 있도록 하고, 더불어 약간의 돈도 벌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래서 외국인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고, 운좋게도 숙소까지 갖춘 농장 한 군데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그쪽으로 소개를 해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공주에서 이곳까지 오는 것이 그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시외버스 타고 대전역으로 가서 KTX 타고 오면 역에 마중 나갈께 이 정도가 어려웠던 것이다. 택시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택시비 얼마달라고 하더냐고 물으니 33만원이란다. 이런 날강도같은 놈들이 있나? 그러면 중간쯤까지 택시 타고 오면 내가 데리러 가겠다, 시간도 돈도 절약할 수 있을 테니 택시비를 깎아달라고 해봐라 했더니 김천을 가던 그 꼽으로 먼 이곳에 오든 택시비는 33만원이라고 하더란다.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농사일을 접고 요즘 농사 컨설팅을 한다. 더불어 일꾼도 소개해준다. 그런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귀띔해준 상태, 동생은 일자리, 숙소 등을 알아놓은 상황이었다. 동생이 데리러 공주까지 갔다 오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늦은 밤에 도착했다. 짐이라고는 작은 캐리어 하나와 과자들이 잔뜩 든 검은 비닐 봉지 두 개가 전부였다. 과자로 며칠을 연명한 모양이었다. 농장에는 너무 늦어 모텔에 일단 잠을 재워 이튿날 새 거처로 동생이 바래다 주었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뻔했던 순진한 태국 처녀의 위급했던 사안은 일단 마무리 되었다.
새 거처에 자리를 잡은 날 나는 출근해서 오랫만에 말레이시아 친구의 호출을 페이스북에서 받았다. 그 친구는 한국에 몇 번 온 적이 있고 그 때마다 내가 약간의 도움(가이드 정도)을 준 일이 있었다. 국제통으로 온갖 나라를 헤집고 다니는 그는 며칠 동안 할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방학이라고 했다.
다음 주에는 방콕에 간다고 했다. 방콕이라고 해서 태국 아가씨 이야기를 꺼냈더니 궁금하다면서 꼬치꼬치 캐고 묻는다.
얼음골 케이블카로 오른 산정에서
그간 있었던 일을 묻는 대로 대답해주었다. 그는 나를 영웅이라고 했다. 그런가? 나는 '태국에서 받은 태국 사람들의 도움을 여기서 조금 되갚아주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라고 했다. 어쨋든 그는 나를 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순간 그가 내 사는 곳을 찾아왔을 때 추운 겨울에 눈치 없이 더 추운 산정에 데리고 가서 그의 아내까지 동사시킬 뻔했던 일을 떠올리며 실소했다.
일단 그녀는 자기 집만큼은 아니겠지만 보일러가 놓은 방에 짐을 풀고 일을 시작했다. 겨울 대비 옷이 없어 춥다고 해서 아내가 안입는 옷을 챙겨다 주었다. 그런데 사이즈가 차이가 많이 난다. 작업복을 입은 모습을 보내오기도 했다.
바라건대 부디 이 땅에서 두둑하니 돈을 벌어서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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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개월을 낯선 땅에서 어려운 일을 하면서 생활했던 태국 아가씨가 12월 19일 자기 나라로 갔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많은 마음의 부담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어쨋든 무사히 귀국하게 되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 못지 않게 친절을 베풀어준 농장 주인이 있었고, 그 자리를 알아봐준 동생의 도움도 컸다. 이 아가씨에게 단번에 반해서 매일같이 찾아와 곁을 떠나지 않았던 노총각도 있었다. 그들이 백년가약을 맺었으면 하는 바램도 없지 않았으나 당장은 의사소통이 문제가 되었다. 의지만 있다면 언젠가는 가능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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